에고 샌디에고
여행 막바지에 동생과 미국을 여행 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디선가 미국 여행에 렌트가 필수라는 말을 주워들은 우리 자매는 미국 서부로 이동하면서 과감하게 렌트를 했습니다. 저는 사실 자가용도 없고 서울에 살기 때문에 거의 운전을 하지 않는데다, 동생은 면허도 없는 상태여서 처음엔 불안한 마음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시애틀의 복잡한 도심을 누비고, 캐나다 밴쿠버까지 다녀온 후, 저는 운전에 대한 자신감이 부쩍 커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애틀에서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여 다시 렌트를 한 후, 라스베가스를 다녀온 후 서부 해안을 따라 로스엔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이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라스베가스에서 화려한 밤을 보내고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오는 길, 중간에 아울렛에 들러 쇼핑까지 한 후, 우리는 잔뜩 신이 났습니다. 짐을 차에 싣고 그날 밤 묵기로 예약해놓은 숙소의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했습니다. 미국의 집주소는 길 이름과 번지수로 이루어져 있어서, 주소 창에 ‘Second Ave 뿅뿅번지’를 입력한 후 네비를 따라 태연하게 주행을 시작했습니다.
지도상 그리 멀지 않아보여서 한시간이면 도착할 줄 알았건만, 네비가 두시간 가까이 급행(Express) 차선으로 우리를 안내할 때 이거 좀 이상한데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네비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인적 드문 어두운 주택가였습니다. 산타마리아 해안과 가까운 번화가에 도착하길 기대했는데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의 축적을 변경해보니, 오잉 우리는 로스엔젤레스에서 남쪽으로 100 km도 넘게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샌디에고에 도착해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주변은 깜깜하고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멘붕에 빠진 우리 자매는 아무데나 눈에 보이는 숙소를 잡고 들어가 할말을 잃은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네비에 주소를 찍을 때 ‘Second Ave’와 같은 흔하디 흔한 길 이름을 입력해놓고 도시 이름을 확인하지 않은 때문이었지요. 동생의 조용한 한마디에 분위기가 풀어졌습니다. “자매끼리 여행해서 정말 다행이야.” “왜?” “친구사이였으면 절교했을거 아니야…”
그렇게 원치 않던(?) 샌디에고를 여행하게 된 우리. 하지만 다음날 아침 청명한 캘리포니아의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자, 우리는 급 긍정적으로 돌변하여, 이왕 여기까지 온겸 알차게 샌디에고를 둘러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우선 코로나도의 깨끗한 백사장과 구도심을 둘러본 후, 해안절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라호야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로스엔젤레스로 이동하는 계획을 짰습니다. 일정은 착착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오전내내 샌디에고의 매력을 한껏 맛본 후, 오후가 되어 라호야의 한 식당에 들렀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서 식사하는 편이 식당에서 먹는 것 보다 낫겠다 싶어 샌드위치를 포장해 밖으로 나섰습니다.
똑같은 미대륙이라도 태평양쪽 해안과 대서양쪽 해안은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새파란 바닷물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우아하고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습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받으며 벤치에 나란히 앉아 룰루랄라 샌드위치 포장을 열었습니다. 날씨도 쾌청하고 샌드위치도 아주 맛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오게 되긴 했지만 샌디에고는 참 좋은 곳이야, 생각하면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동생이 갑자기 으악 외마디 비명을 지릅니다. 옆을 보니 동생이 샌드위치를 노리는 거대한 갈매기의 습격을 받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중입니다. “저 새가 내 손가락을 물었어!”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열 마리 넘는 바다새들이 우리 주위에 모여들어 있습니다. 동생이 급하게 일어나면서 바닥에 쏟아진 샌드위치 상자에 갈매기들이 몰려들어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샌드위치의 잔해를 먹어치웁니다. 그들의 매서운 눈빛이 반경 1 m 내에 있는 유일한 먹거리를 향합니다. 제 손에 들려있는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입니다.
갈매기 부리의 감촉을 맛본 동생은 멘붕에 빠져있고, 그 모습을 본 저도 겁에 질려 손에 남아있던 샌드위치를 멀리 던졌습니다. 철푸덕. 새들이 꽥꽥하며 목표물을 향해 달리거나 혹은 날아갑니다. 한숨 돌리는 사이, 눈앞에 마요네즈를 잔뜩 뒤집어쓴 작은 소년이 서 있습니다. 킥보드를 타고 주변을 지나가다 저에게 샌드위치 조각을 맞는 봉변을 당한겁니다. 너무너무 미안한 마음에 얼른 휴지를 꺼내서 소년의 얼굴과 팔을 닦아줬습니다. 저는 원래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타입이 아닌데, 이 아이가 울기라도 하면 어쩌나, 엄마한테 일러바치면 어쩌나, 미국은 소송 공화국이라는데 고소라도 당하면 어쩌나, 짧은 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킥보드 보이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눈치입니다. 10년도 안되었을 그의 일생은 킥보드를 타고 가다가 샌드위치를 얻어맞는 상황이 자신에게 발생할 수 있을거라 판단하기엔 조금 짧았을 지 모르겠습니다. 저 멀리서 킥보드 보이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아마도 그의 동생일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걸어옵니다. “미안해, 나는 새가 무서워”를 열번쯤 영어로 반복한 후 안녕,을 고하고 허둥지둥 그 장소를 도망치듯 빠져나왔습니다.
황망한 와중에도 제가 라호야 방문 기념 인증샷을 남기기를 주장하자 동생은 어처구니 없어하며 셔터를 눌렀습니다.

ㅋㅋㅋㅋ 갈매기떼를 찍었으면 더 실감날텐데……
얼마나 무시무시한 갈매기떼였는데… 사진으로 남길 여유따위 없었다구요 ㅋㅋ!!
말그대로 Unexpected Journey였네요. 의도치 않은 일을 조우하는 것이 여행의 참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담달에 샌디에고에 가는데 푸른 하늘을 다시 보니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