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여행의 시작

여행은 독일에서 시작했다. 현지 오전 시간에 뮌헨에 도착한 우리는 공항에서 차를 빌려 곧장 독일 남부에 있는 퓌센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오시는 부모님을 이틀 후 이탈리아 밀라노 공항에서 픽업하는 일정이었다. 우리는 뮌헨에서 밀라노로 향하는 방향에 있으면서도, 첫날 무리해서 운전을 하지 않아도 도착할 수 있고, 적당히 볼거리도 있는 퓌센을 첫 목적지로 삼았다.

뮌헨에서 퓌센으로 가는 길은 로마로 향하는 길이라고 이름 붙은 ‘로맨틱 가도’의 일부이다. 나지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한 푸른 초원에 띄엄띄엄 빨간 농가들이 서 있고,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이 이어진다. 미국 위스콘신의 시골길과 비슷한 느낌인데, 길이 조금 더 좁고 훨씬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퓌센 시가지로 진입하니 어디로 눈을 돌려도 보이는 오래된 중세풍 건물들과 그 사이에 깔린 울퉁불퉁한 돌길이 우리가 구대륙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독일의 시간대는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미국의 중부 시간대에 비해 7시간 빠르기 때문에, 이 즈음의 몸은 한창 밤을 새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만 3세의 H 어린이는 수면 부족으로 인한 과흥분으로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다가 탈것에 타자마자 깨꼬닥 기절하듯 잠에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빠른 시차 적응을 위해 여행 첫날에는 최대한 현지 시간대에 맞추어 생활하기로 하고(실제로 시차적응 효과 있는지 없는지 모름) 퓌센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던져두고 곧바로 이곳의 가장 큰 명소인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나와 남편은 여행 계획을 별로 안 세우는 편이다. 도시 위주로 여행의 큰 동선을 잡고 교통편과 숙소를 예약하는 정도가 끝이다. 최근 10년간은 미국 바깥으로 거의 여행을 안 하다 보니 우리의 여행 준비 태세는 더더욱 느슨해 있었다. 그걸 깨달은 건 노이슈반스타인 성 입구로 산길을 올라가는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서 있을 때였다. 티켓 오피스처럼 보이는 곳은 문을 닫았고, 버스 기사님은 현금으로 버스비를 내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수중에 유로를 한 푼도 안 들고 유럽 여행을 온 것이었다. 한국과 미국에서 모든 것을 카드로 결제하는 것에 익숙해져 현금의 필요성을 잊고 있었다. 별수 없이 근처의 기념품 가게 ATM으로 급히 유로화를 출금했다. 외국 은행 카드를 사용해서인지 최종 수수료가 40%나 붙었다. 그렇게 눈물 젖은 유로화를 들고 다시 버스 줄로 갔다.

돈을 찾는 동안 버스를 한 대 떠나보내고 다음 버스가 오길 기다리는데, 이번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일대에 소나기 예보가 있었지만 방금까지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어서 괜찮겠거니 생각했는데, 저 멀리 산등성이에 걸려있던 비구름이 우리 방향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게 눈에 보인다. 문 닫은 티켓 오피스(추정) 앞 처마에 몸을 피하는 순간 폭우가 쏟아진다. 길 건너 기념품 가게에서 내놓은 가판대가 거센 바람을 맞고 쓰러진다. 우리는 가게 주인이 떨어진 물건을 주으러 비바람을 뚫고 달려가는 모습을 애처롭게 쳐다봤다. 그 사이 비를 피하려 몰려든 사람들로 우리가 서 있던 좁은 처마 아래는 인산인해다. 어린이는 빗소리가 무서운지 안아달라고 하더니 ‘비야 비야 저리 가’ 노래를 귀청이 떨어지게 부른다. 혼란한 가운데 다음 버스가 정류소에 들어선다. 때 마침 거세던 빗줄기가 조금 약해지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산 위에 올라가서도 날씨가 괜찮을지 짐작이 안된다.

무계획 인간의 장점은 과감한 결단이다. 우리는 비구름이 처음 보였던 쪽 하늘에 다시 쨍한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고, 버스의 운행 간격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예상 버스 탑승 시간, 비구름이 우리가 있던 곳을 통과하는 속도 등을 종합 고려하여, 성에 도착할 때 즈음엔 그럭저럭 날씨가 괜찮을 지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전히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버스에 탔더니, 우리를 뒤따라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있다. 공교롭게도 모두 한국인 관광객이다. 음, 한국인 십여 명의 집단 지성이라면 믿을만하지. 그걸 우리가 선도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책임감과 불안감이 느껴졌지만….

결론적으로는 노이슈반스타인 성 구경 대성공! – 물론 내부 입장 티켓을 미리 사놓지 않아 외관만 구경하고 돌아왔지만, 어차피 시간이 늦고 피곤했기 때문에 크게 아쉬움은 없었다.(무계획 인간 장점 2: 자기 합리화 잘함)

저녁으로는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버섯 소스를 곁들인 슈니첼을 먹었다. 뜻밖에 남산 왕돈가스의 향기가 느껴져, 미국 생활 중 제대로 된 돈가스를 먹지 못해 평소 불만이 많았던 한 한국인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접시를 비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