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이야기를
자연스럽게도(??) 이곳에서 만난 베프 L은 중국인이다. 이 친구는 북경대 졸업 후 미국에서 국제관계 석사를 한 후 국제기구에서 잠시 일하다가 경제학 박사를 하러 온 인재인데, 일단 나랑 나이차이도 많이 안 나고, 미국인들이 반바지 입고 다닐때 둘만 벌벌 떨면서 어그를 꺼내 신는 등 공통점이 많아서 쉽게 가까워졌다. 이야기가 잘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다만 L은 외국 생활이 오래 되어서 오픈마인드인 편이고, 나는 원래 친중국파여서인지 정치 이야기는 잘 안하게 된다. 이 문장은 처음에 역접으로 썼다가 순접으로 수정했는데(“오픈마인드이고 친중국파인데도 정치얘기는 피한다”에서 위와 같이), 아래는 L이 절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정치에 대한 속마음에 대한 상상 궁예짓을 시도하면서 왜 위의 문장이 순접 연결일 때 더 말이 되는지 설명하는 글이 될 것 같다.
내가 L의 정치 성향을 짐작하게 하는 몇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우리가 퀄을 준비하느라 도서관에서 썩고 있던 지난 여름 날에 발생했다. 퀄 준비비간동안 나는 주로 중남미 출신의 라틴 3인방 및 L과 함께 어울렸는데, 하루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에 카메라를 든 몇 명의 동양인들이 우리를 붙잡았다. 말투를 들어보니 ABC(America born Chinese)로 보였는데, 천안문 사태에 대해 들어봤냐며 관련해 인터뷰를 좀 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거다. 나는 속으로 오오오오 얘네들 뭐하는 애들일까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라틴 3인방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바빠서 안된다고 거절하고, L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도서관 안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녹음, 녹화 기능이 있는 기계 앞에서 영어를 하면 안그래도 없던 어휘량이 1/3로 줄어드는 기적의 여인이기 때문에, 친구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니 급 소심해져서 어~ 들어는 봤는데 나 중국인 아니라서 잘은 몰라~하고 그 자리를 떴다. 나중에 내가 L한테 너 왜 나 버리고 갔냐고 장난스레 핀잔줬더니, L은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천안문 사태는 너무 민감한 문제라 무슨 단체에서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인터뷰에 응할 수는 없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에피소드 2. 모처럼 숙제 부담이 없던 어느 주말 L과 또 다른 중국인 친구 L2,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L2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타고 있던 나와 L이 주로 수다를 담당했다. 그러다 L2가 전날 한국 영화를 한 편 봤는데 굉장히 인상 깊었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영화를 봤냐고 물어보니 택시운전사를 봤다는 것이다. 나도 아직 못 본 영화라 재미있었냐고 물어봤더니, 한국에서는 어떻게 반정부 영화가 상영이 가능하냐며 그런 영화가 개봉된다는 사실 자체가 인상깊었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경을 묻길래 간단히 설명해줬더니, 그런 것도 학교 수업시간에 가르쳐주냐고 또 신기해 하는것이 아닌가. 이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L은 침묵을 지켰다. L2가 우리는 이런거 안배우지? 하고 물어봤을 때 L은 그렇지, 그런건 안배우지, 하고 짧게 동의하는게 전부였다.
마지막 이야기에는 다소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L은 학부 전공이 힌두어라 인도에 머물렀던 경험이 있어서, L이 인도에 품는 감정은 내가 중국에 품는 감정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지난 주에 Amartya Sen이 학교에 오는 행사가 있었다. Sen은 인도 출신의 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박사과정생들은 보통 1년차 미시경제학에서 소비자 선호 및 사회적 선택에 대해 배울 때 그의 이름을 접한다. 그렇다고 그가 책상 앞에만 머무르는 Theory guy인 것은 절대 아니고, 본인이 공부한 바를 조국의 경제 개발에 적극 활용하는 실천하는 지식인이기도 하다. 이 날 우리는 같이 Sen이 오는 행사를 보러 갔는데, 전반부는 그의 일생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상영, 후반부는 관중들의 질문에 답하는 패널 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관중들의 질문 수준이 다소 실망스러운 편이었지만, 우문에 현답을 하는 Sen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나이든 경제학자의 말하기 스타일을 그대로 보유했으면서도 아주 유머러스하고 겸손하기까지 해서 재미있었다. 과반 이상의 관중이 인도인인 와중에 Q&A섹션의 첫 질문은 중국인이 던졌는데, 그는 Sen이 중국의 개발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이많은 인도인 할아버지의 영어를 전부다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답변의 일부로 강력한 중앙정부 시스템을 통해 자원 배분을 밀어붙이는 중국 및 민주주의적 절차를 존중하기 위해 의견 수렴이 필요한 인도의 정치 상황을 비교했다. 인도계로 보이던 또 다른 질문자는 인도인이 갖고 있는 미화, 낭만화된 빈곤한 인도에 대한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Sen의 답변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L에게 너 저 질문자가 얘기하는거에 대해 동의하냐고 물으니 L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떤 개발도상국도 빈곤을 낭만화하지 않아.
나는 이 때 L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한 단계 쯤 올라간 기분을 느꼈다. 학부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바로 진입한 다른 중국인 친구들에게선 민주주의가 확립된 한국이나 미국에 대한 선망을(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위대한 중국에 대한 애국심 및 자부심과 함께) 가끔 느낄 수 있었는데, L은 절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인구수나 경제 규모로 따졌을 때 전 세계에서 중국과 비견할 만한 유일한 국가인 인도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 L로써는, 중국 바깥의 세계에 만연해 있는 민주주의 = 선, 독재 = 악이라는 인식이 중국에 반드시 적용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을 법도 하다. 한국에 있을적의 나는 현실 정치에 꽤 관심이 많은 인간이고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는데에 주저함이 없는 편이었지만,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며 외국인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보니, 내게 다른 나라의 정치 상황에 대해 함부로 언급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래서 오픈마인드의 L과 친중국파인 나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댓글은 못 볼수도 있으니 흔적 남길 겸 블로그 와봤음 ㅋ 어지간한 미디어 보다 이런 미국, 중국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더 이해를 깊게 해주는 듯 ㅎㅎ (여편님이 팬이라고 하니) 한국 오면 같이 한 번 보면 좋겠네 ㅋㅋ
좋지좋지!!! 조만간 잠깐 한국가는데 오래 머물지는 않지만 최대한 맞춰보자!!
오랜만에 와 봤더니 새 글이 있구낭! 나도 여기서 비슷한 성향의 중국인 포닥이랑 정치 얘기 하다가 기본적인 접근에서부터 뭔가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게 이런 거였거니 싶네. 나는 좀 의아해하고 넘어갔는데 민지는 관심 있게 지켜보고 생각해보고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했구나.
오왕 인이다! 응응 좀더 의미있는 분석을 위해서는 그들과 더 많은 접촉(?)과 대화가 필요하겠지만, 너 말대로 우리랑 뭔가 굉장히 다른 접근을 하는 느낌이라 흥미로워! 중국애들과 굉장히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다가도, 정치 얘기 나오면 한국은 정말 미국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 싶기도 하구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