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울로 돌아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귀국하자마자 고향 집에 내려가 설을 보낸 후 올라왔더니, 맛있는 설 음식을 먹느라 얼굴이 뽀얘졌는지, 많은 분들이 생각보다 얼굴이 타지 않았다며 아쉬움을 표하시더군요. 회사 관두고 세계 여행은 다 거짓말이고 블로그에 소설같은 여행기를 지어내서 써 올린거라고 농담을 던져봅니다. 까맣게 탄 피부 덕분에 말레이시아에서 왔냐는 소리를 듣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이렇게 급속도로 한국에서의 생활에, 여행 전의 내 모습에 적응해갑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요 한달 간, 마지막 여행기를 근사하게 써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습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용감하게 떠난 여행이 내 인생에 어떤 교훈과 영감을 남겼는지 거창하게 써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드라마틱한 변화 따위 사실은 없다는걸 알면서도, 지어서 써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몇 번이나 노트북을 폈다 접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멕시코 치아파스 지방의 커피콩으로 핸드드립한 커피를 만나고서야 부담감을 조금 덜어놓았습니다. 여행 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치아파스의 새파란 하늘을 수놓던 형형색색의 종이 깃발과 거리를 메우던 폭죽소리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정도는 쓸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요.

지난 7개월은 이상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평생 가지 않을 곳에서 평생 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일은 어디를 갈까, 그 도시까지 어떻게 갈까, 잠은 어디서 잘까, 내가 버스를 내린 이곳은 어디일까, 내게 말을 거는 저 외국인은 착한 사람일까, 이 택시 아저씨가 나를 납치하지는 않겠지, 저 음식은 대체 뭐로 만든걸까, 뭐 그런 생각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고민을 하는 와중, 모스크바에서 지하철을 탈 때에는 영어 안내가 없으니 내릴 역 수를 잘 세어야 한다는 것을, 고산 지대를 여행할 때에는 코카차를 마시고 따뜻한 옷을 잘 챙겨입어야 한다는 것을, 벨리즈에서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수도를 찾기 힘드니 되도록 낮에 햇볕이 쨍하고 더울 때 샤워를 해야한다는 것을, 미국에서 차를 운전할 때에는 비보호 좌회전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즐거움과 기쁨, 두려움과 외로움이 선명하게 교차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회사다닐 때 ‘학교 다닐 때가 정말 좋았지’하는 생각에 학생 시절의 일기를 펼쳤는데, 그 때의 일기가 온갖 고민과 우울의 집약체여서 놀란적이 있었어요. 또 지금 생각하면 회사 생활도 마냥 싫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구요. 마찬가지로 장기여행자 신분의 삶도 장단점이 모두 있는, ‘인생살이’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여행자로 보낸 짧은 시간이 제게 남긴 흔적은 점점 옅어져 가겠지요. 검게 탔던 피부가 점점 희어지듯, 여행지에서의 추억도 희미해져 갈 것입니다. 자유로운 유목민의 삶에서 정착자의 삶으로 돌아와 현실이 주는 책임감이라는 짐을 다시 어깨에 얹을 시간입니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상상만 해왔던 ‘세계일주’를 직접 해냈다는 사실만큼은, 인생에서 용기와 자신감이 꼭 필요한 시기에 제게 힘을 주는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