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세계에서의 나날 1

이번 여행에서 저는 중국, 몽골, 러시아를 거쳐 유럽을 지나 중남미로 넘어갔으니 짧은 시간동안 제 1,2,3세계를 골고루 경험한 셈입니다. 지금 저는 미국 뉴욕에 와 있습니다. 그간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도 정작 미국은 처음 와 봤네요. 돈과 권력과 사람과 모든 것이 모이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에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보냅니다.

미국에 도착하던 날 저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시티에서 출발하여 애틀란타 경유,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편을 타다가 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지요. 낮기온이 20도가 훌쩍 넘는 따스한 동네에 있다가 차가운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 뉴욕 한복판에 바람막이 점퍼 차림으로 떨어진 판인데다가, 노르웨이의 휴대폰 도난 사고에 이어 두번째로는 미국에서 짐 분실 사건이 발생했다보니, ‘선진국들은 왜 나를 미워하는가’라는 푸념이 절로 튀어나오더군요. 그래도 영어가 통하는 동네다보니 모든 것이 원활하게 처리되어서 얼마다 다행인지. 꼬박 하루를 기다려 짐을 되찾고, 겨울 코트와 미국 휴대번호를 마련하고, 새 옷 위에 다시 돌아온 가방을 매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로 향했습니다.

워싱턴디씨에서는 세 밤을 보냈습니다. 첫날 늦게 도착하여 마지막날 일찍 떠나는 일정이라 제대로 본 날은 이틀에 불과하긴 했지만요. 뉴욕의 호스텔에서 만난 한 여행객은 “디씨에서 3일이나 잔다구? 이틀이면 충분한것 같은데..”라고 말해서 괜히 3박이나 하기로 했나 하면서 갔었는데, 막상 가보니 완전 제 스타일의 도시여서 마지막날 떠나기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조용하고 깨끗한 거리, 중후한 느낌을 주는 건물들, 아기자기한 조지타운 거리, 그리고 내셔널 몰 및 도시 곳곳에 포진한 박물관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연사 박물관, 미국사 박물관, 미국 미술 및 초상화 박물관까지 제가 방문한 모든 박물관이 엄청난 양과 질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어서 매일매일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돌아와야 했지요. 게다가 모든 것이 비싼 이 나라에서 입장이 무료라는 사실!!!! 중남미의 물가에 익숙해져 있다가 미국으로 넘어오니 잔뜩 올라간 물가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인데, 돈 한푼 안 들이고 하루를 보낼 수 있다니 이 어찌 좋지 않으리오.

디씨에서 인상깊었던 점들을 몇가지 간단히 정리하고 마칩니다. 미국사 박물관에서 봤던 “Price of freedom’이라는 전시는 미국의 역사를 주요 전쟁의 순서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독립전쟁, 남북전쟁, 멕시코 및 서부 인디언들을 향해 벌인 영토확장 전쟁, 1,2차 세계대전과 냉전, 한국전과 베트남전, 그리고 평화기에 접어든 현재에 요구되는 미국의 역할 순으로 전시는 이어집니다. 미국의 국가정체성이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에 기반해 확립되어 왔음을 보여주면서, 전시 제목처럼 전쟁은 자유를 위해 치러야했던 대가라고 설명합니다. 한국전 기념홀에도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일관성있게 새겨져 있습니다. 미국의 한국전 참전이 태평양 연안 국가(특히 전무후무하게도 미국 영토를 침략한 경력을가진 국가 일본)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전략적 행위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서도, ‘우리 나라는 알지 못했던 나라와 본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부름에 답한 (우리 나라의) 아들 딸을 기린다.’라고 써놓은 한국전 기념홀의 문구에는 뭉클한 울림이 있더군요. 자국민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한 셀링 포인트를 확실히 아는 나라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이라고 해야할지 아이러니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베트남전기념홀, 한국전기념홀, 링컨기념관과 백악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등이 위치한 이 지역 일대를 National Mall이라고 부르는 것도 제 눈에는 좀 어리둥절했네요. 국가의 정신을 설명하는 건물들이 모인 곳인데 왜 쇼핑센터같은 이름을 붙여놓은건지, ‘Mall’이라는 단어가 더 큰 함의를 지니고 있는데 제가 어설픈 영어실력으로 오해하고 있는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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