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뜻대로 되는건 아니지

재밌고 좋았던 일들 위주로 블로그를 써서 그렇지, 여행의 모든 부분이 뜻대로 잘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남미에서의 불운을 떠올려보면, 리오데자네이루에서 날씨가 안 좋아 머리가 구름에 휩싸인 예수상을 보고왔던 일이나, 칠레 국경일 연휴동안 문 연 식당 찾아 삼만리를 했던 것, 부에노스아이레스 현대미술관을 무료 관람일에 찾아갔다가 긴 대기행렬을 보고 돌아서야 했던 일 등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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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어이없는 안개에 휩싸인 리오의 예수상. 이게 제일 잘나온 사진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우수아이아에서 일어난 카메라 렌즈 고장 사건은 타격이 컸습니다. 다음날 비글투어는 물론, 바릴로체, 푸에르트몬트, 산티아고와 이스터섬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도착하자마자 할일 1번은 단연 렌즈 구입이었습니다. 우선 칠레에서, 어쩌면 남미에서 제일 큰 소니매장을 찾아가 렌즈를 사려고 문의했습니다. 그런데 허그덩, nex시리즈 본체와 함께 산 번들렌즈여서 렌즈는 따로 안 판다고 하네요. 눈물을 머금고 이대로 카메라를 포기해야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때 전세계 여행자의 지식인 트립어드바이저느님께서 산티아고의 카메라 장인 Harry Muller씨를 소개해주셨습니다. 그의 손에 카메라를 맡기고 이스터섬으로 떠났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모아이 석상과 놀다 돌아오니 주말입니다. Muller의 카메라샵은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고, 산티아고의 볼거리는 이미 대충 훑었기에 일요일 당일치기로 근교 도시 발파라이소를 다녀오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스터섬과의 두시간 시차 때문인지 늦잠을 자서, 점심 즈음 출발하는 버스표를 샀습니다. 다른 여행자들로부터 산티아고보다 훨씬 좋았다는 평을 많이 들어서, 잔뜩 기대를 안고 룰루랄라 발포로 향했습니다.
발포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30분경. 그런데 버스터미널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합니다. 주말동안 발파라이소를 둘러보고 일요일 오후에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늦은 저녁에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표는 한 자리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저 역시 당일치기를 맘먹고 산티아고 숙소에 짐을 남겨두고 왔기에 그날 중으로 돌아가는 표를 꼭 구해야 했는데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길고 긴 줄을 서서 겨우 산티아고행 표를 손에 넣었는데, 버스 출발시각은 3시 45분, 시계는 2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서둘러야 할 시간. 주저없이 터미널을 나가 과감하게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기자기한 골목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100년 넘게 운행하고 있는 나무 엘레베이터를 타고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내려오자마자 버스 터미널이라고 써 있는 콜렉티보(시내버스)를 잡아타고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가는데 두시간, 오는데 두시간 걸리는 곳을 고작 50분 둘러보고 산티아고로 다시 돌아가려니 기분이 멍합니다. 점심무렵부터 하루종일 버스만 타고 있는 기분입니다.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파블로네루다의 집도 가보지 못하고 돌아오는게 아쉽기만 합니다. 다시 칠레에 올 일이 있다면, 발파라이소와 이슬라네그라에 있는 네루다의 집을 전부 순례하고 오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뮐러 아저씨의 카메라샵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씨익 웃으며 카메라 전원을 켜주는 아저씨께 무챠스 그라시아스와 당케쉔과 땡큐를 베리머치 날려 드렸습니다. 꽤 많은 돈이 깨졌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여행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의 비용입니다. 짱짱해진 카메라를 들고 북쪽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속도가 느려져 사진 업로드가 아주 귀찮아 졌다는건 나쁜 소식이군요….

2013-10-07 09.34.38
눈썹까지 하얀색이라 더 멋진 뮐러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