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섬으로의 휴가

산으로 둘러싸인 산티아고의 풍경이 서울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말씀을 드렸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휴가라도 떠나는양 들떠서 산티아고발 이스터 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의 외딴 섬 이스터섬은 여러가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부활절에 이 섬을 발견해서 붙은 Easter Island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있고, 스페인어로는 Isla de Pascua로 번역됩니다. 한편 이 섬의 원래 주인인 폴리네시아계 원주민들은 Rapa Nui라는 이름으로 이 섬을 부릅니다. 저는 남미 대륙 서단에서 날아갔지만, 사실은 이곳은 아시아에서 넘어온 별을 따라 동쪽으로 항해한 사람들이 살던 곳입니다. 이번 여행에서야 알게 된 것인데, 뉴질랜드와 하와이, 이스터섬을 연결하는 삼각형 안 쪽의 태평양 섬들을 폴리네시안이라고 부르고 이들 섬의 원주민들은 같은 선조와 비슷한 풍습을 공유한다고 하네요.

이 섬은 세 개의 화산이 폭발해서 만들어졌고,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검은 해변, 자갈을 쌓아 만든 돌담과 푸른 초원, 마을을 장식하고 있는 야자수 나무에서 제주도가 쉽게 연상됩니다. 제주도에 돌하르방이 있다면 이스터섬에는 모아이 석상이 있습니다. 사람 키만한 것부터 20미터에 다다르는 거대한 사이즈까지, 눈이 달린 것, 모자를 쓴 것, 머리가 부서져 나간 것, 쓰나미에 휩쓸려 넘어진 것, 만들다가 운반에 실패해 땅에 반쯤 묻힌 것 등 각양각색의 모아이 석상을 잔뜩 구경하고 왔습니다.

그나저나 시간대 때문에 정신못차리고 토레스델파이네 트래킹을 시작한 것이 얼마전 일인데, 이번에도 또 멍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상황은 이렇습니다. 제 핸드폰에 나오는 시간에는 칠레 섬머타임이 반영이 안되어 1시간 느리게 표시가 되는데, 이스터섬은 칠레 본토보다 두시간 느린 시간대를 적용합니다. 그러니까 이스터섬 현지시간은 핸드폰에 표시되는 시간보다 한시간 빠른 것에서 두시간 느리게… 즉 한시간 느리게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죠.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왜 새벽에는 이게 그렇게 계산이 안되는건지, 일출을 보러 여섯시에 나간다는게 실수로 네시에 나가버려서, 보려던 일출은 못보고 대신 별만 잔뜩 보고왔네요. 그래도 모아이를 배경으로 한 밤하늘이 정말정말 참 멋있었는데, 우수아이아에서 작동을 멈춘 카메라는 지금 산티아고의 카메라 장인 손에 맡겨져있고 폰카는 한참 성능이 떨어지는 탓에 아쉽게도 제 소유의 사진은 없네요. 낮에 찍은 사진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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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섬에서의 에피소드를 하나 더 소개하고 마칩니다. 이스터섬은 고립된 위치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여행지로 악명이 높습니다. 저같은 백수 거지 여행객에게는 가능한한 많은 식료품을 섬 밖에서 가져가는 것이 여행 경비 절감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침 이스터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산티아고는 남미 최대의 한인타운이 있는 도시입니다. 제가 묵었던 호스텔에서 10~15분정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 오랜만에 배터져라 한식도 먹고, 햇반과 컵라면, 김치 등 이스터에서 먹을 거리들을 잔뜩 사들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3일간 싸간 음식으로 야금야금 끼니를 해결하고, 슬슬 쉰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 김치는 수겹의 비닐봉지로 꽁꽁 싸서 방문 밖에 뒀습니다. 나흘 째 아침, 이스터섬을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를 위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은 후 김치를 찾아 방 밖으로 나갔는데 으잉, 김치통을 담아뒀던 가방이 텅텅 비어 뒤집혀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김치와 함께 가방에 넣어두었던 자잘한 튜브고추장, 인스턴트 커피 등이 5미터는 되는 거리의 화단에 떨어져 흙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간밤에 거센 바람이 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김치는 어디로 간건지… 큰 통에 담겨 있는걸 산 탓에 무게도 꽤 나갔는데… 실종된 김치를 애도하며 마지막 컵라면을 먹고 이스터섬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