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고생의 결정판

9월 14일부터 18일까지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4박5일간의 트래킹을 마치고 속세로 돌아왔습니다. 가히 사서 고생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 나와 산, 산과 나

저는 늘 언제나 서두가 긴 사람이므로 저와 등산과의 인연을 잠시 설명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대학 시절, 캠퍼스의 낭만을 꿈꾸며 들어간 클래식기타 동아리에서는 어쩐지 방학 때마다 등산을 갔습니다. 등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원활한 동아리 생활을 위해서는 참여하지 않을수 없어서 따라다녔는데, 배낭을 메고 허덕허덕 거리며 앞사람을 쫓아가다 정신을 차려보면 설악산 대청봉도 지리산 천왕봉도 제 발 아래에 있더군요.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는 한 달에 한 번씩 부하 직원들과 함께 주말에 등산을 가길 원하는 상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발적으로'(라고 쓰고 안가면 죽는다 로 읽습니다) 참여하라고 해서, 저도 ‘자발적으로'(라고 쓰고 돈이 웬수다 로 읽습니다) 등산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친한 친구가 결혼을 해서’ 치트키나 ‘주말에 부모님이 서울에 오셔서’ 치트키도 종종 썼지만요…

– 어쩌다가 토레스 델 파이네까지

누군가에게는 토레스 봉우리를 보는 것이 남미 여행의 목표이자 최대 로망이겠지만, 저에게 파타고니아는 오고가는게 멀어서 생각보다 길게 체류하고 있는 동네입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 까지 엘찰텐에서 봤던 토레스 산과 이곳 토레스 봉우리가 같은 곳인줄 알았으니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우수아이아에 가서 남미 대륙의 끝을 한번 보고는 오고 싶은데, 엘칼라파테에서 그곳까지 가는 길에 칠레 국경을 넘어가 푸에르토 나탈레스와 푼타아레나스를 거치는게 괜찮은 루트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탈레스의 호스텔에 갔더니 가로세로가 2m는 될법한 커다란 토레스델파이네 지도가 벽에 붙어있습니다. 일일 투어나 할까 하고 호스텔 주인아저씨께 설명을 부탁했는데, 설명을 듣다보니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조금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5일 후 돌아오는 버스 티켓을 예매하고, 등산화와 폴대, 헤드랜턴을 빌리고 있었습니다. 5일간 산에서 먹을 식량을 사서 배낭에 넣어보니 무게가 묵직합니다. 나 살아서 돌아올수 있을까, 걱정이 머리를 스칩니다.

– 불운은 첫날 다 썼다

아르헨티나에서 칠레로 국경을 넘어와 보니 핸드폰 시계가 한 시간 앞당겨져 있습니다. 저는 철썩같이 한국과의 시차가 13시간 나는 GMT-4 zone에 들어와 있다고 믿고, 출발일 아침에 일어나 느긋하게 샤워를 했습니다. 7시, 슬슬 아침이나 먹으러갈까 몸을 일으키는데, 호스텔 스텝이 차량이 왔다면서 방문을 두드립니다. ‘오잉 아저씨 8시에 간다매요-‘ 물으니 ‘지금이 8시야 얼른나와’ 대답이 돌아옵니다. 허겁지겁 가방을 마저 싸고, 젖은 머리로 봉고차에 올라탑니다. 지금까지도 이게 무슨 조화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데, 산에서 만난 칠레에서 교환학생중인 미국인들의 말로는 얼마 전에 시간대가 한시간 바뀌었답니다. 덕분에 5일 간 산에서 펼쳐질 대장정의 준비가 허접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 비수기의 루트 선정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루트는 크게 산을 빙 둘러보는 길과 사이의 계곡 및 봉우리를 보기 위해 들어갔다 오는 길로 나뉩니다. 한바퀴를 빙 둘러보면 O코스고, 절반정도 둘레길을 걷다 사이사이 빙하, 계곡, 봉우리를 보고 오면 W코스가 됩니다. 짧은 시간에 W코스를 따라 주요 감상포인트를 다 보고 오려면 주요 사이트에서 캠핑이 필수적인데, 저는 이 한겨울에 텐트에서 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포드라운 도시여자이므로, 돈을 좀 쓰더라도 둘레길의 산장(refugio)에서 머물기로 애초부터 결심을 했습니다. 여름에는 산장 예약이 진작에 꽉 찬다고들 하지만, 지금같은 비수기에는 예약없이 가도 대부분의 침대가 텅텅 비어있습니다. 다만 9월 16일부터 영업을 개시하는 곳이 몇군데 있어(시작일은 14일), 비수기에도 열려있는 서쪽  Pehoe호수의 산장에서 먼저 이틀을 자고, 그 후에 동쪽에 있는 산장으로 이동하는 코스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막상 가보니 텐트에서 자는 사람들도 꽤 있더군요. 등산로의 난이도는 크게 높지 않았습니다만, 계절적 요인으로 눈과 얼음은 있었습니다.

– 게다가 발걸음이 느렸다

진작에 W를 완성하는 일은 쉽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저는 지도에 써있는 모든 코스를 예상시간보다 30분에서 1시간 늦게 걷는 쾌거를 이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왕복 포인트를 약간 못미치게 다녀오는 아쉬움이 남았지요… 마지막의 토레스 봉우리 전망대는 교통편과 숙박을 하루 연장하지 않으면 보기 힘든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전화로 버스 연장하기 귀찮음, 토레스 산장의 살인적인 가격(도미토리 침대 하나가 7만원이라니!!!! 여기가 노르웨이냐!!!!), 바닥나다 못해 땅을 파고 든 체력, 다 먹어치워버린 식량 등을 감안하여 과감하게 skip하였습니다.

– 토레스델파이네의 의생활

지금 이곳은 갓 한겨울을 넘겼습니다. 티셔츠 몇겹 위에 패딩 잠바를 입고 호스텔에서 빌린 방수바지를 입었습니다. 낮에 짐을 메고 이동할 때에는 패딩을 벗고 바람막이만 겹쳐도 땀이 날 정도였지만, 밤에는 패딩을 입고 등산양말까지 풀셋트로 신은 후, 침낭 속에 끝까지 들어가야만 겨우 잘만 했습니다. 산장도 이렇게 추웠는데 대체 텐트에서 어떻게들 자는건지 미스테리 했어요. 방수바지는 속에 땀이 잔뜩 차서 늘 벗고 싶었는데, 눈 덮인 계곡에서 방수 바지 덕을 톡톡히 보며 엉덩이로 내리막길을 내려온 후에는 벗고 싶은 생각이 싹 없어졌습니다.

– 토레스산도 식후경

이곳에서의 식생활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침에는 그릇에 물을 담아 분유를 풀어 우유를 제조한 후 시리얼을 말아 먹습니다. 점심에는 식빵에 크림치즈, 잼을 바른 후 햄, 체다치즈를 얹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습니다. 저녁에는 소세지 넣은 파스타, 참치 넣은 컵라면으로 열량을 보충했습니다. 걷는 중에는 끊임없이 초코렛과 시리얼바를 먹고, 계곡에서 뜬 빙하 녹은 물에 레모네이드 가루를 타 마셨습니다. 모든 등산로가 계곡을 건너게 되어 있어 식수 걱정 없는 것이 좋았습니다. 또 늦겨울에 여행한 덕분에 기온이 낮아 햄이나 치즈 따위가 상할 염려가 없었던 것도 좋았지요.

– 산에서 내려와 생각해보면…

5일간 평지와 산길을 70km가량 걷고나니 10년치 등산은 다 한 느낌입니다. 어깨와 발목이 비명을 지르듯 쑤셔오다가, 통증에도 아랑곳않고 짐을 지고 걷는 주인의 의지에 굴복해 잠잠해졌습니다. 끝이 없어보이던 황량한 평원을 뚜벅뚜벅 걷다가 갑작스레 눈앞에 호수와 설산이 펼쳐지던 기억, 산을 넘고 넘다 고개를 드니 거대한 빙하가 밀려오고 있던 장면, 빙하에서 얼음이 무너져 내리며 나는 우르릉 소리, 찬란하게 빛나던 호수의 다양한 빛깔이 카메라에 담겼습니다. 사실 막판에는 힘들기도 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눈이 익숙해지기도 해서, 왠만한 그림에는 카메라를 들이댈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

제 마음속에는 미처 문자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조각들이 잔뜩 쌓였습니다. 끝없어 보이는 산길을 걸어가며 힘들 때에는 과거의 즐거웠던 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도 하고, 걱정만 하지말고 시간 난 김에 이런것도 하고 저런것도 해야지 생각도 하다가, 어느덧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몸상태를 느끼고 내 몸이 지금을 전시 상황 쯤으로 인식하고 있나보다 피식 웃음을 지었습니다. 혹시나 한국에 피난 행렬이 다시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고어텍스와 등산용 폴대로 다들 무장하고 있겠군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하다가, 그러다 문득 뒤돌아서 오른편에는 뾰족한 봉우리, 왼편에는 호수가 늘어선 장관을 보고나면, 인생 살이의 사소한 고민과 시름, 잡생각들은 단숨에 잊을 수 있었습니다.

파타고니아, 토레스델파이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트래킹을 떠난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무난하게 잘 지나온 것 같습니다. 크게 무리하지 않고 다녀오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5일 내내 비가 한방울도 안오고 해가 따사롭게 내리쬐는 정말 드물게 좋은 날씨 운을 탔던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곳의 풍경을 잘 ‘보기’위해서라면, 일일투어도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호수와 산이 한눈에 보이는 중요 전망대만 골라서 차를 세워주기 때문에 사진은 더 예쁘게 잘 찍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흙냄새를 맡고, 빙하 소리 새소리를 귀로 듣고, 빙하가 녹아 흐르는 계곡물을 직접 맛보고, 두 발로 단단하게 땅을 딛는 경험은 산에서 잠을 자 가며 직접 수일간 걸어봐야만 할 수 있습니다. 예기치 못하게 이렇게 파타고니아를 제대로 ‘느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