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헬싱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3일을 보냈습니다. 이번 주는 여름 휴가차 오신 어머니와 함께 하는 (지금까지의 여행에 대비하면 몹시 호화스러운) 여정을 보낼 예정입니다.

이 곳은 모든 것이 깨끗하고, 사람들은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페리 터미널 구석에도 멋스러운 디자인의 의자가 놓여있는 나라입니다. 길거리에는 긴 금발머리를 질끈 동여맨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투명한 피부의 여인들이 돌아다닙니다.(그치만 남자분들이 금발 수염을 30cm도 넘게 길러서 심지어 땋기도 한 모습은 제 기준으로는 좜 그랬어요…) 하얀 벽에 둥근 초록 돔을 얹은 헬싱키 대성당, 핀란드 미술 작품을 충실히 소장한 아테네움 미술관, 암석 가운데 독창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며 지은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등이 헬싱키의 볼거리입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한 볼거리를 담고 있는 이 도시의 분위기는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북유럽의 디자인을 닮았습니다.

모든 것이 딱 적당하고, 다르게 말하면 무난한 이 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좋아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충분히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을 꼽아보자면, 우선 하나는 대여섯시면 문을 닫는 가게와 공공기관들. 토요일 오후에 도착해 일~월요일에 걸쳐 도시를 둘러보는데, 일요일은 일찌감치 문을 닫고 월요일은 휴관인 곳들이 많아 못 본 박물관도 있었습니다. 화려한 밤문화에 익숙한 한국 여인들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부분이었죠. 또 트램이나 페리같은 공공 이동 수단에서 좀처럼  검표기나 검표원을 찾아보기 힘든 광경도 특이했는데, 개개인의 자율성과 양심에 대한 높은 신뢰를 지닌 핀란드 사회의 모습이 감동스럽기까지 할 지경이었습니다. 얼마전까지 유리 진열대 너머로 물건을 골라야 하던 러시아를 경험하다가 이 곳으로 왔더니,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 두나라가 어쩌면 이토록 다를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어리둥절합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의 훌륭한 영어실력입니다. 중국, 몽골, 러시아처럼 지독하게 영어가 안 통하는 나라를 여행하면서, “후훗 내 영어 실력 정도면 꽤나 훌륭하지”하는 착각에 빠져있다가, 이곳에 와서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영어학원 테스트 받는 양 느껴져서, 물건이나 표 살 때마다 깨갱하고 움츠려들게 됩니다. 북유럽 사람들의 영어가 훌륭한 것은 익히 알고 있던 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디스 굿 퀄리티! 왓 프라이스 원트?” 식의 서바이벌영어가 아닌, 손님들에게 유머를 건낼 만큼의 종업원들, 가게 직원들의 영어 실력은 꽤나 놀랍게 느껴집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은 디자인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의 만족도 조사 설문입니다. 5분이면 된다고 해서 응답하겠다고 했는데, 1-5점 척도의 객관식 질문도 아닌 박물관 관장 면접 수준의 주관식 질문이 우수수 쏟아져서-디자인 박물관은 왜 중요하냐? 디자인 박물관의 미래는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 등-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다양한 설문 표본이 필요했을 터, 영어가 서툰 동양인들 중 이 설문에 대답해줄 사람을 애타게 찾았을 박물관 직원을 위해,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엄마를 만난 덕분에 도미토리 신세를 벗어나 잠시 좋은 호텔로 숙박을 잡았습니다. 조식 부페와 핀란드식 사우나 시설을 느긋하게 이용하며 헬싱키에서의 짧은 시간을 즐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