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의 만남
돌로미티가 ‘텐트 밖은 유럽’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덕분인지, 돌아다니면서 한국인 여행객들을 꽤 많이 마주쳤다. 유럽인들처럼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도 보였고, 산세가 수려한 곳이다 보니 등산복 차림의 단체 관광객과 산악자전거 같은 액티비티를 즐기러 온 젊은 커플들도 눈에 띄었다.
나는 스몰톡이 필수인 문화권에 살고 있기도 하고, 원래도 여행 중에 만나는 되는 모르는 사람들과 편하게 얘기를 나누는 편인데, 이번 여행 중에는 부모님 세대의 우아한 대화술에 비하면 아직 내공이 많이 부족하구나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이런 대화가 오가는 거다. 세체다 산을 보러 가는 길에 우리 시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의 점잖으신 장년층 부부와 케이블카를 함께 타게 되었다. 그분들이 먼저 “가족이 함께 여행하는 모습을 보니 보기가 좋습니다”하며 운을 떼시면, 우리 시부모님들이 “아들 내외가 미국에 살고 있어서 이산가족 상봉한 격입니다”하면서 대화를 잇고, 그럼 그분들이 “아 손주가 하나시라고요? 저희는 다섯이에요 호호” 하면서 누구네 가정이 더 화목하나 조용한 배틀을 이어가시는 거다. 고도로 발달한 중장년 한국인들의 화법은 중세 시대 귀족 영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더니 과연 그러했다.
하루는 360도 전망을 즐길 수 있는 라가주오이 산장에서 어딜 바라봐도 그림 같은 전망을 즐기고 있던 중, 젊은 한국인 여성이 우리에게 사진을 부탁해 왔다. 혼자 여행 중이라는 말에 나는 남편에게 특별히 사진을 많이 찍어드리라고 주문했고, 남편은 혼여행 중에 좀처럼 남기기 힘든 뒷모습 사진까지 야무지게 찍어 핸드폰을 돌려드렸다. 시부모님이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신 테이블로 갔더니 마침 마키아또가 실수로 한 잔 더 주문되어 나와있었다. 나는 마침 잘됐다는 생각에 아까 만났던 여성분을 다시 찾아 커피를 전해줬다. 그리고 어느덧, 내가 과거의 ‘언니들’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고 내가 혼자 여행을 즐기던 시절, 나의 여행에는 늘 ‘언니들’이 함께 했다.
언니들은 주로 우연히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숙소에 묵고, 티켓 오피스의 같은 줄에 서게 되면서 만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질주하고, 터키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식당에서 이름 모르는 메뉴를 시키고, 향기를 모르는 술을 함께 마셨다. 언니들은 등산을 하다 다리가 풀린 내게 토마토를 사 먹이고, 자기 집 지붕 아래에서 나를 재우고, 공항으로 가는 밤 버스에서 졸고 있는 내게 어깨를 빌려줬다.
‘언니들’이 내게 해줬던 것들을 돌이키다 보니 내가 선사한 자매애는 너무 소소했던 것만 같아 조금 부끄럽다. 그렇지만 내가 수많은 언니들을 만났던 것만큼이나 앞으로도 또 많은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 믿어 본다.
라가주오이 산장 인근을 다 둘러보고 천천히 점심 식사를 마쳤을 무렵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워낙 산봉우리가 높다 보니, 돌로미티에서의 날씨는 대체로 들쑥날쑥이다. 마침 케이블카에서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었던 우리 가족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비를 피해 산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가벼운 차림으로 짐도 거의 들지 않고 여행을 하고 있던 그분은 비에 젖지 않고 잘 내려왔을까 궁금했다. 케이블카는 꼬불꼬불한 산길 중턱에서 타고 내리는데, 마을까지 이동은 어떻게 하는 걸까? 그렇지만 과거의 내가 씩씩하게 혼자 이 대륙 저 대륙 잘 쏘다녔듯, 그도 아마 알아서 잘 다니고 있을 것이니 굳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혹시 필요할 때엔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줄 이들을 분명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