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을 지나

리마에서 키토까지는 버스로 꼬박 38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나라의 우등보다도 낮은 등급인 세미까마를 탔는데, 2층의 가장 앞좌석인데다 옆자리에 아무도 타지 않아 생각보다는 편하게 이동했습니다. 그래도 버스에서 이틀밤을 자는건 정말 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키토를 지나 보고타까지 가는 콜롬비아 여행객들이 “키토는 정말 가깝구나”하며 일찍 내리는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휴식시간마다 짬짬이 서툰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저에게 말을 붙여주던 친근한 이 사람들과는 할로윈 사탕과 맥주를 나눠먹기도 했는데, 이들은 제가 내린 후로도 이틀을 더 버스에서 보냈을겁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번 여행에서 제일 지루했던 이 시간동안 제일 많이 했던 생각이 “회사 다닐땐 어떻게 지겨운걸 참고 다녔을까?”였다는것. 38시간의 버스 여행이 직장생활보다 낫다고 느껴지는걸 보면 이 여행을 하는게 운명이 맞긴 했나봅니다.

리마에서 오후 다섯시에 버스를 탔는데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 도착한건 다다음날 아침 일곱시였습니다. 어두운 새벽시간이 아닌 밝은 아침에 도착한건 좋았지만, 더 일찍 도착할 줄 알고 숙소를 이틀치 예약해놓은게 아까웠습니다. 그런데 호텔에 가니 숙박비는 하루치만 받고 체크인은 아침에 바로 시켜줘서 기분이 둥실둥실, old town 한가운데라 위치도 좋고 깔끔하고, 다음날 일찍 비행기를 탄다고 아침을 포장해주기까지 하는 친절을 베풀어줘서 너무 만족스러웠던 Hotel Real Audiencia는 급 광고글로 변질되었군요… 간만에 마음에 쏙 드는 숙소였어서 한번 홍보해봅니다.

다음날 새벽 여섯시 비행기로 멕시코로 떠날 예정이었고, 사실 멕시코행 비행기가 가장 싼 도시가 키토여서 애초에 이곳에 온 것이라 키토에서 주어진 시간은 딱 한나절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론리플래닛에서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old town을 둘러보라고 추천하고 있고, 숙소로 이동하던 중 언뜻 보기에도 정말 아릅다기는 했지만, 식민지풍 도시는 리마나 쿠스코, 라파스에서도 많이 본 탓에 그리 끌리지가 않습니다. 사실 규모와 보존 정도에서 차이가 날 뿐 거의 비슷비슷하거든요. 고민끝에 ‘에콰도르’라는 이름에 걸맞는 적도선을 찾아가는 일정을 선택하고, 여독에 찌든 몸을 이끌고 숙소를 나섰습니다.

키토 북부에 있는 적도선 근처 문화복합단지의 이름은 ‘Mitad del Mundo’, 영어로는 middle of the world, 즉 세상의 중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전차와 버스를 이리저리 갈아타가며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지구모양의 기념석이 있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 과학자들이 주장한 이곳은 실제 적도선보다는 300m쯤 비껴간 곳이기는 하지만 기념사진을 찍기에는 좋은 곳이죠. 셀카를 찍으며 주위를 휘휘 둘러본 후 GPS상 진짜 적도선이 지나가는 근처의 소규모 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적도선위에서 눈을 감고 걷거나, 못 위에 계란을 세우는 실험등을 했습니다. 설명에 따르면 적도 위에서 눈감고 균형을 잡기는 남반구나 북반구에서 하는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액체로 속이 채워진 계란의 중심을 잡기에는 더 쉽다고 하네요. 기분탓인지 저도 엄청나게 비틀거리며 적도선을 걷고, 계란 하나를 깨먹기는 했지만 못 위에 달걀 세우기에도 성공했습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적도선, 남반구, 북반구에서의 물의 소용돌이 방향을 확인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적도선 위에서는 스핀 없이 곧바로 구멍으로 떨어지는 물이, 단 몇 발자국만 이동해도 남반구에서는 시계방향, 북반구에서는 반시계방향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걸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같이 구경한 외국인들과 “This is so cool!!!”이라며 환호성을 연발했네요.

 

브라질 북동부에서 남미여행을 시작한 후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 우수아이아에서 ‘세상의 끝’을 본 후 북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에콰도르를 거쳐 ‘세상의 중간’을 지난 저는 이제 남미에 안녕을 고하고 중미로 갑니다. 남반구의 겨울에 이곳에 와 날이 따뜻해질 무렵에는 계속 고산지대를 여행해서 늘 긴팔만 입고 다녔는데, 멕시코에서 한동안 따스한 시간을 보내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