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 아르헨티나에 작별을 고하고 칠레로 넘어왔습니다. 한동안은 안데스 산맥 서쪽에 위치한 이 길고 긴 나라 모양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어느덧 여행을 시작한지 100일이 다 되어갑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게 여행을 하니 좋겠다고 많은 분들이 부러워해 주셨지만, 장기 여행에도 단점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게을러지기 쉽다는 것. 바릴로체 1004호스텔과 같이 좋은 숙소를 만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파타고니아에서 안데스 산맥의 설산과 호수를 실컷 보고 눈이 잔뜩 높아져서, 바릴로체에서는 크게 밖으로 돌아다니고 싶은 감흥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차피 호스텔 창 밖 풍경이 웬만한 전망대보다 좋으니, 대부분의 시간을 쇼파에 누워 전자책을 다운받아 읽으며 보냈습니다. 이곳에서는 여행기가 아니라 독후감을 써야할 판입니다.

바릴로체에서 서쪽으로 국경을 넘어오면 푸에르트몬뜨라는 항구 도시가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끼니 때 마다 고기를 고묵고묵 먹었다면, 칠레는 해산물을 해묵해묵 먹을수 있는 곳입니다. 수산 시장에 가서 조개와 닭, 소세지, 밀떡 등을 푹푹 끓인 꾸란도(??어제 먹은 음식인데 이름이 벌써 생각이…)라는 해물탕을 먹었습니다.

푸에르트몬뜨 구경은 두어시간으로 마치고, 저녁에 다시 야간버스를 타고 산티아고로 향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이후 오랜만에 맞이하는 대도시라 기분이 이상합니다. 걸어다닐 수 있는 작은 마을만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지하철을 타고 숙소에서 먼 곳으로 나오려니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상파울로와 리오데자네이루,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티아고는 각각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를 대표하는 남미의 전형적인 대도시이면서도 약간씩 느낌이 다릅니다. 상파울로는 넓은 들판위에 사방팔방으로 끝없이 빌딩이 뻗어져 나가는 다소 멋없는 회색 도시, 리오데자네이루는 해변가의 고급 맨션과 언덕 위 남루한 파벨라가 뒤섞인 복잡한 해안 도시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00여년 전 세워진 화려한 대리석 장식의 유럽풍 건물이 거리를 휘황찬란하게 빛내고 있는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민 붐이 사그러들고 난 후 롤러코스터 경제 변동을 겪은 고단함이 거리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그에 비하면 산티아고는 분지 지형으로, 빌딩숲 뒤에 우뚝 솟아있는 안데스 산맥에서 서울의 북한산과 같은 친근함을 느끼게 됩니다. 또 산티아고 곳곳에는16세기 스페인 식민지시대 때 부터 내려오는 건물들이 남아있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의 대도시들보다 더 유서깊은 곳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저와 반대 루트를 타고 북쪽에서 내려온 여행객들은 산티아고가 참 볼거리가 없는 곳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아마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 그들이 보고 내려온 페루나 볼리비아의 더 제대로된(?) 식민지풍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또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싶습니다.